서론
나는 종종 바빠지면, 앞으로 10일 정도의 일정을 담은 시간표를 그린다. 해야 할 일을 언제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시각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지난 수요일 즈음, 중간고사를 위하여 시간표를 구성했다. 금요일이 시간이 비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홀로 가는 것 보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훨씬 즐겁다. 내가 보고 느낀 것, 너가 보고 느낀 것에는 차이가 있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즐겁다. 이번에는 네 명의 친구에게 순차적으로 물어보았다. 순차적으로 거절당하고 침울한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싣었다.
오늘 방문한 장소는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이고, 전시는 다음과 같이 지칭한다. <<MMCA 뉴미디어 소장품전-아더랜드>>
총 세 점의 작품이 있었다.
본론
각종 열매와 꽃이 검은 공간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지니며 떠돌아다니는 영상이었다. 말하자면 정물화 속 객체들을 모아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여성의 공간을 되살리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정물화에 주로 등장해 온 (열매를 맺는)암꽃과 열매들. 이들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은유하는 가상의 공간을 화면 안에 (<정물> 연작이)재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도 은유적이다. 의미망의 구축이 과도하게 느슨하다. 나는 이 정물 객체들이 움직이면서 어떠한 패턴, 특수한 상징을 내포하는 패턴을 보이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1분 39초의 영상에서 그 어떠한 패턴도 찾지 못했다. 단순히 내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그들의 움직임은 컴퓨터로 추출한 난수에 가까워 보였다. 속도와 방향 모두 말이다.
그렇기에 과도하게 은유적이라는 말이다. 작품의 이름이 '정물'인데, 작품에 등장하는 꽃과 열매들 만으로 여성의 공간을 유추하기란 고도로 어려운 일이다. 설명을 먼저 본 상태에서도 납득하기가 힘들기에, 이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온전히 전한다고 볼 수 없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Horizontal-Vaakasuora', 2011' 우리의 인식 속에서 나무는 하늘로 솟은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한 방향으로 굽었다가 하늘로 솟은 소나무들이 있겠다. 이때 굽은 소나무가 인간에게 큰 영감을 주는 이유가 바로 이 인식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나무를 옆으로 눕힐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나무의 생, 그 긴 수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스크린에 딱 붙어서 나무를 거슬러 오르듯, 우측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나무가 점차 흔들리고, 얇아지고, 배경이 하늘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무의 역사를 훑어 본 것이다. 더 오래 된 공간에서, 더 최근의 공간으로. 나무에게 높이는 곧 나이이므로. 더 많이 흔들리는 더 높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이 떠올랐다.
김영현, '느린 약속', 2023
김영현, '느린 약속', 2023 2023년 12월 26일에 촬영한 작품이고, 한예종 미술원 조형예술과 제 24회 졸업전시 작품 중 하나이다.
아마도 난 저 작품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나무를 깎아서 매듭을 만든 것. 나무의 나이테는 곧 시간의 흐름인데, 그것을 매듭의 형상으로 깎아내어 드러낸 작품.
오늘 'Horizontal-Vaakasuora'의 꼭대기 방향으로 걸으며 저 졸업작품이 번쩍 떠오른 것은 필연이리라. 나무의 첨단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나무를 깎아 노끈의 전 후와 다른 축으로 시간(나이테)을 드러내는 것과 놀랍도록 닮았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옛 나이테는 없어지고, 새로운 나이테로 채워진 얇아지는 나무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저 늘어선 프로젝터가 주는 충격 또한 있었다. 사실 작품의 감상 이전에, 늘어선 프로젝터를 한동안 감상했다. 우리는 항상 하나의 프로젝터를 본다. 정말 많아야 3개가 가로로 큰 화면을 구성한다. 그런데 무려 6개의 프로젝터가 한 화면을 구성한다니, 이 또한 예술이 아닌가? 과천현대미술관의 회랑에 전시된 백남준의 작품과 결이 같은 느낌이다. 더욱 현대적인 버전.
오늘 전시된 세 작품 중, 가장 짙은 서사를 품고 있다. 다른 두 작품의 서사는 매우 옅다. 정물들은 단지 허공을 날아다니고, 나무는 그저 바람에 흔들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간 순서로, 작업 과정을 드러낸다. 제작된 파빌리온을 크레인으로 들어 바다에 넣고, 작은 배로 끌고 이동하여, 바다 한가운데에 끌어내려 설치하고,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경각심을 주는데, 상당한 영상연출이 가미되어 있었다. 섬세하게 조율된 음악과 효과음이 시청자의 마음을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이것을 3회 보았는데, 처음에는 신기함을, 두 번째에는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세 번째에는 다소간의 불쾌함을 느꼈다. 불쾌함의 원인은 영상에 깔린 '소리'를 인식했기 때문이고, 그 소리가 시청자의 판단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장르에서 공통적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있다. 나는 그것이 교조적 태도라 생각한다. 환경오염의 위험을 강조하고 싶더라도, 그것을 가르치려는 태도로 제시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 특히 심장소리를 점차 키워나가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부분이 불쾌했다.
하지만 분명 그 시도는 가치가 있다. 인정한다. 파빌리온의 제작과 입수. 그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나름의 효과가 있다. 우리의 시선을 심해로 끌어당기고,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던 장소로 우리의 의식을 옮겨놓는다. 세상에 단 한번도 바다에 존재한 적이 없던 거대한 조형물이, 바다 생물에게 처음으로 감각되는 순간이 주는 전율 또한 있다. 아름다운 작품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상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싶다. 영상 속 스쿠버다이버가 그랬듯, 나도 물 속에서 그것을 보고 싶다. 전시장 내부에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는 '물 속에서 파빌리온을 보았던 경험'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이 묘사를 보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영상이 아닌, '물 속의 파빌리온'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진짜 예술 작품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이 영상이 예술품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내 결론은 그렇다. 이 영상은 왜곡되어 있다. 순수한 초현실적 경험을 영상으로 담는 과정에서, 오염되었다고 본다. 초현실적 경험을 영상연출의 수단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열화가 발생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Dong Aitken to Hans Ulrich Obrist, 2019'
'Dong Aitken to Hans Ulrich Obrist, 2019' 전반적으로 재미있는 전시였다.
2025-04-18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