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n

비평문

잘 조화된 세계에 대한 시선들



1. 서론

<공중정원>은 작가 다섯 명의 작품을 함께 보여주는 전시다. 복도를 기준으로 양 옆에 방이 줄지어 있고, 각각의 방 하나 혹은 둘 정도에 한 명 내지 두 명의 작가가 만든 작품이 모아서 전시되어 있다.

전시에는 순서가 유도되지 않았고, 방에 번호가 부여되어 있었으나 전시와는 상관없는 번호였다.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처음으로 들어간 방에는 양승원 작가와 조이솝 작가의 작품이 있었다.


양승원 작가의 작품은 다소 난해했다. 시멘트나 흙 등을 촬영하고, 3D 모델링으로 만든 형태에 덧씌우는 것으로 고산수 정원을 재해석 했다고 하는 그 작품들은 이질적이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면,”이라 전제하며 “작가가 만든 정원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리 주변의 현상들을 치열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더욱 작품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작품들이 식물과 자연이 갖는 보편적 특징을 비유하지 못했다고 느꼈고, 그렇기에 우리의 세계를 반영하지 못했으며,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시멘트가 굳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퇴적암이 수화작용으로 굳어지는 것과 동일하며, 3D 모델링으로 만들었다는 모양들은 현실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시멘트가 인위적인 인간 도시를 상징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고, 그렇기에 후자의 3D 모델링 작업이 갖는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가 내 마음에는 닿지 못한 것이다.


한편, 두 작가가 한 개의 방을 공유하도록 배치하고, 그 방이 계단과 가장 가까운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양승원 작가의 작품들은 나무로 된 받침에 아크릴로 만들어진 판들이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비추는 조명의 따뜻한 색감이, 내가 느낀 이질감과는 별개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 옆에 전시된 조이솝 작가의 작품들은 검거나 얼룩진 흰색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조형물들이었다. 이러한 이미지의 대비가 작품의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인공물로 자연을 표현하여 깔끔한 형상과 따뜻한 색감을 가진 전시물들과, 식물의 형상이지만 검고 기괴한 형상을 가진 전시물은 <공중정원>이란 전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자연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거나, 자연의 속성을 빌려서 세상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내놓는 것이다. 자연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에 재미있는 작품도 있었고, 흥미로운, 궁금증이 샘솟는 작품도 있었다. 서론 이후에는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두 점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다.



2. 작품의 가능성을 붙잡는 아쉬움에 대하여

아래의 작품은 콘센트와 플러그와 깃털을 식물 모양으로 조형하고, 검게 칠한 형상을 갖는다.

조이솝, 검은 꽃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넘버.3, 2023

작품 설명을 읽기 전에는, 이 작품에서 상실이나 무력감을 읽을 수 없었다. 작품 설명에는 상처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성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나는 신선하고 새로운 형상에서 인간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보았다. 콘센트와 플러그는 앞서 양승원 작가의 작품에서 제시한 시멘트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인간의 문명과 사회를 상징한다. 가장 인위적이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물건을 모아서 식물의 형상을 빚어냈다는 점에서, 작품이 내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검은 색상은 콘센트와 플러그가 가진 개성과 관념을 지우고, 그것들의 집합을 식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함으로 해석되었다. 깃털 장식 사이에 빼곡한 플러그의 은색 금속 부분은, 만개한 꽃의 암술로 보였다. 순환하듯 서로를 연장시키는 콘센트와 플러그의 무더기가 바닥에 늘어진 모습은, 자연스럽게 뿌리로 보였다. 검게 칠하여 은닉된 대량의 전선과 콘센트가 뿌리의 모양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위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 들도 자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세상이 물리법칙에 근거하여 움직이고, 우리의 창작물을 인위적인 것이라 분리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자연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런 사실을 떠올리게끔 해 준다고 생각했다. 전기와 기계로 대변되는 문명도 자연에 속한다고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우리의 ‘정원’도, 인위적으로 정돈된 공간일지라도, 자연에 속하고 자연을 참조하는 것이라고 작가가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작품 설명을 읽고서, 작품을 해석하며 느낀 즐거움이 가라앉고, 사고의 확장이 중단되었다.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끈질긴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라는 검은 색에 대한 해설과, “(성소수자로서의) 상실감과 무력감, 불안정성을 드러내면서도 의연하게 서”있는 식물이라는 설명은 내 머릿속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다. 작품이 다소 진부한 소재와 메시지를 모아서 조형한 것으로 바뀌었다. 식물이 아닌 것들을 모아서 식물의 모양으로 조형하는 것으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생각이 진부해 보인다면 과한 생각인가? 사군자(四君子)를 화폭에 옮기고, 난초의 잎을 닦는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가? 꽃다발이 갖는 기쁨과 슬픔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너무도 아쉽다. 새롭고 신선한 형상이 아쉽다. 더 많은 메시지를 품고, 생각과 고민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있는 이 작품이, 과하게 자세한 해설로 인해 빛이 바래는 상황이 아쉽다. 작품이 구상력의 한계 지점에서 해석될 기회를 잃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품었을 다양한 생각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리는 해설이 야속하다.



3. 세계에 대한 작가의 사고가 투영되는 그릇

아래 작품은 관객과 상호작용을 한다. 관객은 검은 원기둥 상단부에 달린 화면을 조작하여, 마치 목성이나 해왕성에서 보던 것 과 같은 흐름 위에 떠다니는 소리 오브젝트를 움직일 수 있다. 각각의 오브젝트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품고 있으며, 아래 사진의 달처럼 보이는 흰색 원이 혜성 같은 ‘소리 오브젝트’와 충돌할 때 오브젝트가 품은 소리가 재생된다. 원기둥은 그릇이라고 표현되었으며, 원기둥의 내부로부터 바깥으로 이미지가 투사되고 있는 것으로 추청 된다(천장에 비치는 빛이 프로젝터로 비추는 것과 닮았다).

고휘, 소리 오브젝트를 담은 3개의 그릇을 위한 구성, 2023

일단, 이 작품이 전시된 방에는 위의 이미지와 같은 기둥이 3개가 있었다. 3개의 기둥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단순히 여러 관객이 동시에 체험하기를 바랐던 것 일까? 궁금하다.


이 작품은, <공중정원> 전시에서 가장 오랜 시간 관찰한 작품이다. 작품의 설명과 내 체험이 상이해서 그렇다. 전시 설명문을 인용하자면, “관객은 화면을 터치하여 흐름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소리 생태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지만 소리 오브젝트들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통제하거나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시험해 본 바로는 각 오브젝트를 흐름에서 완전히 유리시키거나 전혀 다른 흐름에 집어넣는 조작이 가능했다. 충분히 손을 바쁘게 놀린다면, 원하는 위치에 오브젝트가 정지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했으며,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는 모든 조작이 자유로웠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작이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하도록 만들어 진 것은 의도되었는가? 아니면 프로그램의 오류일까?

나는 의도되었다고 느꼈다. 흐름이 곧 인생이고, 각각의 오브젝트가 자연 속의 사물(사람을 포함한 모든 객체)에 대응된다면 흐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존재해야만 한다. 비유의 규모를 줄여서 어느 한 공간의 자연과 자연 속 오브젝트들의 상호작용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흐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흐름에서 벗어나기 쉬운지, 어려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흐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지가 중요하다. 객체가 가진 특징과 상황에 따라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객체가 속한 세상이 벗어나기를 허용치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공중정원>의 전시 설명문에서 그랬듯이 “전시된 작품들은 ……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생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참조하고 재현하는 방법론적 실험을 시도”한다면, 객체가 속한 세상이 객체를 완전히 구속하면 안 된다.


한편 오브젝트가 원에 닿을 때 재생되는 소리가 굉장히 듣기 좋아서, 전시물이 설치된 작은 방의 분위기가 좋았다. 여러 관객에 의하여 조작되었기에 한없이 무작위에 가깝게 재생되는 소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듣기 좋았다. 모닥불이 무작위로 형상을 바꾸는 것이 연상되는 소리였다. 멍하니 계속 바라볼 수 있는 불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조합으로도 어울리는 소리들만 모아서 오브젝트에 대응시켰을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소리들의 조화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무작위 속에서 피어나는 조화가 세상에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그 현상에 개입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4. 다른 작가들에 대하여

김준 작가의 작품도 소리와 사진을 결합한 형태였다. 저마다 다른 대상에 대한 이미지(탁본 혹은 사진)와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환경에 대한 소리를 관객에게 동시에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지와 소리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던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배열한 방식과 소리가 재생되는 위치가 흥미로웠다. 나무로 된 집 모양의 뼈대에 균등하게 분산한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전 방위적인 소리의 급류, 서랍 속에 배치된 스피커의 지향성 있는 소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 관객과 분리된 채로 감상되었다면, 김준 작가의 작품은 관객을 집어삼키고 관람하게 한다.


현남 작가의 작품은 다소 느낌이 달랐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현상이 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인식과 맞닿은 느낌이라면, 현남 작가의 작품은 보다 사회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느낌이 강했다. 고도화된 문명의 문제점이나, 산업과 공학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작품으로 만들어 낸 느낌을 받았다. 사고가 난 차량의 사진이나, 공장의 연기와 조합한 녹아내리다 굳은 형상의 비스무트(271도에서 녹는 다양한 색상을 내는 금속)는 특히 더 그렇다. 다만 이것이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는 않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여러 요소를 직시하기를 바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느껴졌다.



5. 총평

흥미로운 시도가 많은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세계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전시였다. ( * )


2023-10-22 방문

2025-10-26 비평문 완성